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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자화상, 1887년경, 시카고 미술관
자화상, 1887년경, 시카고 미술관
신상정보
본명 Vincent Willem van Gogh
출생 1853년 3월 30일(1853-03-30)
네덜란드 쥔더르트
사망 1890년 7월 29일(1890-07-29)(37세)
프랑스 제3공화국 오베르쉬르우아즈
주요 작품
영향
Portal icon 예술 포털

빈센트 빌럼 반 고흐(네덜란드어: Vincent Willem van Gogh[a], 네덜란드어 발음: [ˈvɪnsɛnt ˈʋɪləɱ vɑŋ ˈɣɔx] ( )[b], 1853년 3월 30일~1890년 7월 29일)는 네덜란드후기인상주의 화가로, 서양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불과 10여 년 만에 그는 약 860점의 유화를 포함하여 약 2,100점의 예술 작품을 창작했는데, 그 대부분은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제작되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풍경화, 정물화, 초상화자화상 등을 포함하며, 대부분 대담한 색채와 드라마틱한 붓놀림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근대 미술에서 표현주의의 부흥에 기여하였다. 반 고흐의 작품은 그가 37세의 나이로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야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3] 생전에 반 고흐의 그림 중 팔린 작품은 《아를의 붉은 포도밭》 단 한 점뿐이었다.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반 고흐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진지하고 조용하며 생각이 깊었으나, 정신적 불안정의 징후를 보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그는 미술품 거래상으로 일하며 자주 여행했지만, 런던으로 발령받은 후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종교에 귀의하여 벨기에 남부에서 선교사 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건강 악화와 고독 속에 힘들어 했다. 그는 예술의 모더니즘 경향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부모님에게 돌아온 1881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남동생 테오가 그를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신을 주고받았다.

반 고흐의 초기 작품은 대부분 정물화와 농경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1886년 그는 파리로 이주하였고, 인상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에밀 베르나르폴 고갱을 포함한 예술적 아방가르드 일원들을 만났다. 파리 생활에 좌절한 상태에서 예술적 변화와 협력의 정신에 고무된 반 고흐는 1888년 2월, 남프랑스아를로 이주하여 예술가들의 은신처이자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곳에서 그의 그림은 더욱 밝아졌으며, 현지의 올리브 나무, 밀밭, 해바라기를 묘사하며 자연 세계로 관심을 돌렸다. 반 고흐는 고갱을 아를로 초대했고, 1888년 말 고갱의 도착을 간절히 기다렸다.

반 고흐는 정신증 에피소드와 망상을 겪었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 불안정에 대해 걱정했고, 신체적 건강을 소홀히 하여 제대로 먹지 않고 과음하는 날이 많았다. 고갱과의 우정은 면도날을 들고 대치한 끝에, 반 고흐가 분노하여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른 사건으로 끝이 났다. 반 고흐는 생레미드프로방스생폴 요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하여 1년간 지냈다. 퇴원 후 파리 근처 오베르쉬르우아즈라부 여관으로 이주하여 동종요법 의사인 폴 가셰의 보살핌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우울증은 나아지지 않았고, 1890년 7월 29일 반 고흐는 리볼버로 가슴을 쏘아 자살했다.

반 고흐의 작품은 생애 마지막 해에 비평가들의 예술적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사후에 그의 예술과 인생 이야기는 오해받은 천재의 상징으로서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는데, 이는 상당 부분 미망인이 된 그의 제수 요하나 반 고흐봉어르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4][5] 그의 대담한 색채 사용, 표현력 있는 선, 그리고 두꺼운 붓질은 20세기 초 야수파독일 표현주의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반 고흐의 작품은 이후 수십 년 동안 광범위한 비평적,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는 고뇌하는 예술가라는 낭만적 이상을 대표하는 영원한 아이콘이 되었다. 그의 유산은 세계 최대의 반 고흐 회화 및 드로잉 컬렉션을 보유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의해 기려지고 있다.

오늘날 반 고흐의 작품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들에 속한다.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붓꽃》이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0만 미국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다.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첫 번째 판)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한국돈으로 약 580억원)에 일본의 다이쇼와제지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당시 74세)에게 팔림에 따라,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6] 이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미국의 수집가에게 4,400만 달러에 다시 팔렸다.

편지

반 고흐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1차 자료는 그의 남동생 테오와 나눈 서신이다. 형제의 평생에 걸친 우정과 빈센트의 생각 및 예술 이론 대부분은 1872년부터 1890년까지 주고받은 수백 통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7] 테오 반 고흐는 미술상이었으며 형에게 재정적, 정서적으로 지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예술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8]

테오는 빈센트가 보낸 모든 편지를 보관했지만,[9] 빈센트는 자신이 받은 편지 중 극히 일부만 보관했다. 두 사람 모두 사망한 후, 테오의 미망인 요하나 반 고흐봉어르가 그들의 편지를 정리하여 출판하였다. 1906년과 1913년에 몇 통이 공개되었고, 대다수는 1914년에 출판되었다.[10][11] 빈센트의 편지는 웅변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하며 "일기 같은 친밀함"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어 왔으며,[8] 부분적으로는 자서전처럼 읽힌다.[8] 번역가 아놀드 포머랜스는 이 편지들의 출판이 "사실상 다른 어떤 화가에게서도 볼 수 없는, 반 고흐의 예술적 성취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한다"고 썼다.[12]

면도를 깨끗이 한 젊은 시절 화가의 머리 사진. 덥수룩하고 물결치는 머리카락, 높은 이마, 그리고 경계심 있고 주의 깊은 표정의 깊게 들어간 눈을 가지고 있다.
형과 외모가 비슷하지만 깔끔하고 잘 정돈되었으며 차분한 모습의 젊은 남성 머리 사진.
1873년 헤이그구필 화랑에서 일하던 당시의 빈센트 반 고흐(왼쪽);[13] 그의 동생 테오(오른쪽 사진, 1878년)는 평생의 후원자이자 친구였다.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600통이 넘고, 테오가 빈센트에게 보낸 편지는 약 40통이다. 여동생 에게 보낸 편지 22통,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 58통,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22통이며, 폴 시냐크, 폴 고갱,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 등에게 보낸 편지들도 있다. 일부 편지에는 스케치가 그려져 있다.[8] 많은 편지에 날짜가 적혀 있지 않지만, 미술사학자들은 대부분을 연대순으로 배치하였다. 아를에서 보낸 편지의 경우 필사 및 날짜 표기에 문제가 남아 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빈센트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영어로 약 200통의 편지를 썼다.[14] 형제가 함께 살았던 파리 시절에는 서신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기에 기록에 공백이 있다.[15]

빈센트의 편지에는 당시 높은 보수를 받던 화가 쥘 브르통이 자주 언급되었다. 1875년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는 브르통을 보았다고 언급하고, 살롱에서 본 브르통의 그림들에 대해 논의하며, 브르통의 책을 하나 보내주는데 반드시 돌려달라는 내용도 있다.[16][17] 1884년 3월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브르통의 시 한 편이 자신의 그림에 영감을 주었다고 언급한다.[18] 1885년에 그는 브르통의 유명한 작품인 《종달새의 노래》를 "훌륭하다"고 묘사하였다.[19] 이 편지들 사이의 시점인 1880년 3월경, 반 고흐는 쿠리에르 마을에 있는 브르통을 만나기 위해 도보로 80 km를 걸어갔다. 하지만 브르통의 성공과 그의 저택을 둘러싼 높은 담벼락에 위축되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돌아왔다.[20][21][22] 브르통은 반 고흐나 그의 방문 시도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화가 사이에 오간 알려진 편지는 없으며, 브르통이 1891년 자서전 《예술가의 삶》에서 여러 동시대 화가를 언급했지만, 그 중에 반 고흐는 없다.

반 고흐의 일생

어린 시절 (1853~1869)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주에서 가톨릭 신자가 많았던 쥔더르트에서 태어났다.[23] 아버지 테오도로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 1822~1885)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 카르벤투스(Anna Cornelia van Gogh-Carbentus, 1819~1907)였으며, 둘 사이의 장남이었다. 빈센트 빌럼이라는 이름은 할아버지 이름과 1년 전 사산되어 죽은 형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c] 그의 할아버지 빈센트(1789~1874)는 유명한 미술품 거래상으로, 1811년 레이던 대학교에서 신학 학위를 받은 분이었다. 할아버지 빈센트에겐 여섯 아들이 있었고, 그 중 세 명이 미술품 거래상이 되었다.[25]

빈센트의 어머니는 헤이그의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고,[26] 아버지는 목사의 막내 아들이었다.[27] 둘은 빈센트의 이모(코넬리아)와 삼촌(빈센트)이 결혼했을 때부터 만났다. 빈센트의 부모는 1851년 5월에 결혼했고, 곧이어 쥔더르트로 이사했다.[28] 남동생 테오도뤼스 테오는 1857년 5월 1일에 태어났다. 그 외의 형제자매로는 아나, 엘리사벳 (리스), 아나, 빌레미나 야코바 (빌), 코르넬리스 (코르)가 있었다.[29] 그들의 사이는 그렇게 좋은 게 아니어서 빈센트는 오직 테오도뤼스와 빌레미나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빈센트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은 여성으로, 주변에 항상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30] 아버지는 목사였기 때문에 적은 봉급을 받았지만, 아버지가 부임한 교회에서 가족에게 집, 하녀, 요리사 두 명, 정원사, 마차, 말을 제공했다.[31]

빈센트는 진지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고[32] 전해진다. 집에서 어머니와 가정교사에게 가정교육을 받았고, 1860년에는 200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 성격의 쥔더르트 마을 학교로 보내졌다.1864년에는 집에서 32km 떨어진 개신교 교사가 운영하는 제벤베르헌의 기숙학교에 입학했는데, 빈센트는 거기서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껴서 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떼를 썼다.[33] 그러나 1866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틸뷔르흐의 중학교로 보내졌다.[34]

미술에 대한 관심은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빈센트에게 그림을 그리라 권유했는데,[35] 초기 그림들은 후대의 그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33][36] 빈센트가 틸뷔르흐의 빌럼 2세 국립중학교에 입학한 것도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예술가였던 콘스탄트 코르넬리스 하위스만스(Constant Cornelis Huijsmans, 1810~1886)가 교사로 있기 때문이었다. 하위스만스는 기법 그 자체보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주는 인상을 포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37] 그러나 1868년 3월, 빈센트는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빈센트는 후에 자신의 학창시절이 "엄숙하고 차갑고, 불모지"였다고 회고했습니다.[38]

사회 초년 시절

구필 화랑 (1869~1876)

1876년의 빈센트

1869년 7월, 빈센트의 큰아버지 센트는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 빈센트를 위한 자리를 구해주었다.[39] 빈센트는 화랑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뒤, 1873년에는 런던 사우샘프턴가에 있는 구필 화랑 런던 지점으로 옮겨 스톡웰의 해크포드 로드 87번지에서 하숙하였다.[40] 빈센트의 제수인 요한나 반 고흐봉어르는 이 순간이 빈센트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빈센트는 20살에 아버지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을 정도로 일에서 성취감을 느꼈다. 빈센트는 하숙집 딸인 외제니 로이어에게 푹 빠졌지만, 외제니 로이어는 이미 전에 하숙하던 사람과 비밀리에 약혼했던 탓에 빈센트의 고백을 거절했다. 이후 빈센트는 자신을 가두고 종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후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1875년에 파리로 전근을 주선했고, 빈센트는 거기에서 미술상들이 미술품을 지나치게 상품화한다며 분개하였다. 결국 1년 후에 해고되었다.[41]

1876년 4월, 빈센트는 영국으로 돌아가 램스게이트의 작은 기숙학교에서 무급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였다. 학교 주인이 미들섹스아이즐워스로 이사하자, 빈센트도 따라 갔다.[42][43] 그러나 빈센트는 거기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이후 런던의 선교단체에서 직업을 찾다가, 감리회 소속 목사인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Thomas Slade Jones)의 조수로 생활을 했다. 빈센트는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 목사와 함께 궁핍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몇 차례 설교도 했다.[44]

그러나 빈센트는 거기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그 해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왔다. 큰아버지 센트의 주선으로 도르드레흐트의 서점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그 일에 만족하지 못하여 낙서를 하거나 성경의 구절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시간을 보냈다.[45] 그는 기독교에 몰두했고, 채식을 하며 검소한 식사를 하는 등 점점 더 경건한 삶을 추구하여 마치 수도승과 같은 삶을 살았다.[46][47] 당시 그의 룸메이트였던 파울루스 반 괴를리츠에 따르면, 반 고흐는 고기를 먹지 않고 검소하게 식사했다고 하였다.[47]

선교사의 길 (1877~1880)

1877년, 아버지를 따라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빈센트의 열정에 부응하여, 가족들은 그를 암스테르담에서 존경받는 신학자였던 이모부 요하너스 스트리커르(Johannes Stricker, 1816~1886)에게 보냈다.[48]. 빈센트는 이모부의 지도 아래 암스테르담 대학교의 신학 입학 시험을 준비했지만,[49] 시험에 실패하고 1878년 7월에 이모부의 집을 떠났다. 이후 그는 브뤼셀 근교 라켄에 있는 개신교 선교 학교에서 3개월 과정을 수강했다. 비록 전도사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벨기에의 탄광지대인 보리나주로 파견될 수 있었다.[50]

1879년 1월, 빈센트는 벨기에 보리나주에 있는 가난한 광산촌 쁘띠와스메스에서 평신도 선교사직을 맡았다.[51] 가난한 신도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빵집에서 구한 하숙집을 노숙자에게 내어주고 작은 오두막으로 이사를 가서, 짚을 침대삼아 잠을 잤다.[52] 그러나 빈센트를 파견한 선교단체에서 보낸 시찰단은 빈센트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성직자의 존엄성을 훼손했다"며 해고하였다. 빈센트는 중재를 부탁하고자 브뤼셀까지 75km를 걸어, 아는 목사를 찾아갔고,[53] 목사의 중재로 보리나주에 있는 퀴엠으로 돌아와 다시 무급으로 선교를 하였다. 그러나 빈센트는 에턴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라는 부모의 압력에 못이겨 집으로 돌아왔다.[54] 그는 1880년 3월까지 집에 머물렀는데, 가족은 빈센트의 정신상태를 걱정하여, 아버지는 빈센트에게 헤일에 있는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하였다.[55][56][57]

그러나 빈센트는 1880년 8월에 퀴엠으로 돌아가 광부와 함께 10월까지 머물렀다.[58] 그는 주변 사람들과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테오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하면서 그것들을 그림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빈센트는 이때부터 성직보다도 미술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화가의 길

에턴, 헤이그 (1881~1883)

왼쪽에는 앞마당이 있는 2층 벽돌집이 나무에 부분적으로 가려진 채 사진에 담겨 있고, 오른쪽에는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빈센트가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한 퀴엠의 집

1880년 말에 그는 네덜란드 예술가 빌럼 로엘로프스(Willem Roelofs, 1822~1897)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는 테오의 권유에 따라 브뤼셀으로 떠났다. 로엘로프스는 정식 미술 학교를 싫어하는 반 고흐를 설득하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도록 했다. 1880년 11월, 아카데미에 등록한 빈센트는 해부학, 소묘, 원근법 등 기본 미술 교육을 받았다.[59]

젊은 여성이 왼쪽을 바라보고 있고, 오른쪽에 아이가 서있다.
코넬리아 키 보스 스트리커르와 그의 아들 얀. 1880년 경 사진.

이듬해 빈센트는 1881년 4월 에턴으로 완전히 돌아와 가족들과 장기간 머물렀다.[60] 빈센트는 계속 그림을 그렸는데 이웃을 소재로 삼은 그림이 많았다. 1881년 8월, 과거 암스테르담에서 신세를 졌던 이모부 요하너스 스트리커르의 딸 코넬리아 "키" 포스 스트리커르(Cornelia "Kee" Vos-Stricker)가 집에 방문하였고, 빈센트는 그녀와 같이 오래 산책을 하곤 했다.[61] 코넬리아는 빈센트보다 7살 연상으로 8살짜리 아들이 있었는데, 얼마 전 남편을 잃어 미망인이 된 상황이었다. 빈센트는 모든 가족을 놀라게 하며 코넬리아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했는데, 코넬리아는 "아니, 안돼, 절대"(Nooit, neeen, nimer)라며 거절하였다.[62] 코넬리아는 곧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고, 빈센트는 그림을 판매하기 위해 헤이그를 방문하여 외사촌인 안톤 마우베를 만났다. 마우베는 빈센트가 갈망했던 성공한 예술가였다.[63] 마우베는 그에게 몇 달 후에 다시 오라고 초대했고, 그동안 목탄과 파스텔로 작업해보라고 제안했다. 반 고흐는 에턴으로 돌아가 이 조언을 따랐다.[63]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16통의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들에서 샤를 바르그의 《드로잉 강좌》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강좌 덕분에 이전에는 그릴 수 없었던 것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바르그의 드로잉 연습을 꼼꼼히 연구하고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인물 소묘에 대한 통찰력이 더 깊어졌어. 측정하고, 보고, 큰 윤곽선을 그리는 법 등을 배웠지. 그래서 예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것들이 이제는 점차 가능해지고 있어. 신께 감사드립니다." — 반 고흐, 테오에게 보낸 편지 172번, 1881년 9월.[64]

1881년 11월 말에는 이모부 요하너스 스트리커르에게 다시 편지를 쓰고, 암스테르담으로 떠났다.[65] 이모부는 테오에게 이 편지가 공격적이라고 설명했다.[66] 코넬리아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고, 이모부 부부는 빈센트의 집요함이 역겹다고 적었다.[67] 절망에 빠진 그는 램프의 불에 왼손을 집어넣고 "내가 불꽃 속에서 내 손을 유지할 수 있는 동안 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 고 했다고 한다.[67][68] 이모부는 빈센트에게 코넬리아의 거절을 받아들여야 하며,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는데, 이는 주로 반 고흐가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이다.[69]

빈센트는 헤이그를 방문하여 한달 동안 마우베에게 수채화를 배우고,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갔다.[70] 그러나 교회에 가지 않겠다며 아버지와 다툰 끝에 다시 헤이그로 떠났다.[d][71] 1882년 1월 마우베는 유화를 가르쳐주고 작업실을 마련할 돈을 빌려주었다.[72][73] 그러나 한 달도 되지 않은 채 둘 사이에 불화가 생겼는데, 아마도 석고 모형을 그리는데 대한 의견 차이였던 것으로 보인다.[74] 반 고흐는 길거리 사람들을 모델로 고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우베는 이러한 관행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다. [75] 빈센트는 6월에 임질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서 3주를 보냈다.[76]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에게서 빌린 돈으로 첫 유화를 그렸다.[77] 빈센트는 자신의 유화 작품을 상당히 만족스러워했다.[78]

창밖으로 옅은 붉은색 지붕들이 보인다. 푸른 하늘에는 새 한 마리가 날아가고, 가까운 곳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마을과 다른 건물들이 보인다. 저 멀리 지평선에는 굴뚝들이 보인다.
《헤이그의 아틀리에에서 바라본 지붕》, 1882년 그림.

마우베는 1882년 3월부터 빈센트의 편지에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79] 그가 차갑게 돌아선 것은, 빈센트가 알코올 중독자인 매춘부 클라시나 마리아 "시엔" 호르니크(Clasina Maria "Sien" Hoornik, 1850~1904)라는 여인과 동거중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후였다. 빈센트는 1882년 1월 말, 다섯살 짜리 딸을 가진데다 임신중이었던 시엔과 교제를 시작하였다.[80] 시엔은 이전에도 두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사망했는데 빈센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81] 같은해 7월 2일에 그녀는 아들 빌럼을 낳았다.[82] 빈센트의 아버지는 이들의 관계를 알게 되자, 빈센트에게 이들을 떠나 보내라고 설득했다. 빈센트는 처음에는 반항하고[83] 시엔과 아이들을 위해 도시 밖에 집을 얻어줄까 생각했지만, 1883년에 결국 이들을 떠나보냈다.[84]

가난때문에 시엔이 다시 매춘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반 고흐는 점점 불행해졌고, 가족 생활이 자신의 예술적 발전과 양립할 수 없다고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시엔은 딸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아들은 오빠에게 맡겼다.[85] 빌럼은 12살 때 어머니와 함께 로테르담에 방문했는데, 삼촌이 시엔에게 빈센트와 결혼해서 빌럼을 합법화하라고 설득하던 모습을 기억한다고 말했다.[86] 빌럼은 빈센트가 자신의 아버지였다고 믿었지만, 둘이 만난 시기를 고려할 때 빌럼의 생부가 빈센트일 가능성은 낮다.[87] 시엔은 1904년 스헬더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88]

1883년 9월, 반 고흐는 네덜란드 북부의 드렌터주로 이사했다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12월에 노르트브라반트주 뉘넌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88]

뉘넌과 안트베르펜 시기 (1883~1886)

뉘넌의 목사관 정원》, 1884년 5월 그림.
어두운 방 안에서 천장에 랜턴이 켜져 있고, 다섯 명이 작은 나무 탁자에 둘러앉아 커다란 음식 접시를 바라보고 있으며, 한 사람은 주전자에서 음료를 따르고 있다.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4월 그림.

빈센트는 뉘넌에서 그림과 소묘에만 몰두하였다. 집 밖에서 빠르게 작업하며, 직조공과 오두막을 스케치 했다. 싱어 라런에서 2020년 3월에 도난당한 《뉘넌의 목사관 정원》도 이 때 작품이었다.[89][90] 1884년 8월부터 이웃에 살던 열 살 연상의 마르호트 베헤만(Margot Begemann)이 빈센트가 그림을 그리는 현장에 따라 다녔다. 그녀는 반 고흐에 사랑에 빠졌고, 반 고흐도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마음을 열였다. 둘은 결혼을 추진했지만, 양가 어디도 결혼에 찬성하지 않았다. 마고는 독극물인 스트리크닌을 먹어 음독자살을 기도했지만 빈센트가 급히 근처 병원으로 데려간 끝에 살아남았다.[82] 1885년 3월 26일에 심근 경색으로 빈센트의 아버지가 사망하였다.[91]

반 고흐는 1885년에 정물화를 여러 점 남겼다. 뉘넌에서 2년가량 머무는 동안, 그는 수많은 소묘와 수채화, 그리고 200여점의 유화를 완성했다. 이 시기의 그림은 주로 음침한 흙빛, 특히 어두운 갈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기 작품에 보이는 생생한 색채는 찾아볼 수 없다.[92] [93]

또한 이즈음 파리의 딜러로부터 연락을 받기도 했다.[94] 테오는 빈센트에게 전시할 준비가 된 그림이 있는지 물었는데,[95] 5월에 《감자 먹는 사람들》과 몇 년간 작업한 《농민 인물 습작》 여러점을 보냈다.[96] 그러나 판매가 잘 되지 않아 빈센트는 테오에게 좀 더 영업을 잘 해보라고 이야기하고, 테오는 빈센트의 그림이 다른 인상주의 작품들처럼 밝지 못하고 너무 어두침침하다며 반박했다.[92] 8월에 헤이그에 있는 상인 루르스의 가게 창문에 처음으로 공개 전시되었다. 9월에는 빈센트의 작품에 모델로 참여한 마을 농가 소녀 중 한 명이 혼외임신을 하는데, 빈센트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마을의 전임 성직자는 주민들에게 더 이상 빈센트의 그림에 모델로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97]

빈센트는 겨울 11월에는 안트베르펜으로 이사하여, 회화용품점 위층의 방을 발렸다.[98] 생활비는 아주 빠듯해서 회화용품을 좀 구입하고 빵, 커피, 담배를 사는 것 외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1886년 2월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 7개월 동안 따뜻한 식사는 여섯 번 정도 한 게 전부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즈음 이가 흔들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99] 빈센트는 자신의 작품이 침침하고 인기가 없다는 테오의 말을 기억하고 안트베르펜에서 미술관에 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을 감상하는 등 채색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그림에 카민, 코발트블루, 파리스 그린 등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안트베르펜의 부둣가에서 일본에서 들어온 우키요에 목판화를 구입했고, 나중에 자신의 그림에 이 스타일을 접목시켰다.[100] 이즈음 빈센트는 다시 폭음을 하기 시작하였다.[101] 1886년 2-3월에 과로, 부실한 식사, 과한 흡연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했는데,[102][103] 거기서 매독도 치료한 것으로 추정된다.[104][e]

《이탄 더미가 있는 농장》, 1883년경
어두운 방 안에서 천장에 달린 등불 아래, 다섯 명이 작은 나무 탁자에 둘러앉아 커다란 음식 접시를 바라보고 있고, 한 사람은 주전자에서 음료를 따르고 있다.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회복후, 빈센트는 학문적인 교육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안트베르펜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 고등부 입학 시험에 응시하여, 1886년 1월에 회화와 드로잉 부문에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는 과로, 부실한 식단, 과도한 흡연으로 병들고 쇠약해진 상태였다. 1886년 1월 18일부터 석고상 드로잉 수업과 회화 수업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빈센트의 파격적인 화풍과 정규 교육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곧 학교 원장이자 회화 교수인 샤를 베를라(Charles Verlat)와 마찰을 빚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로잉 교수 프란츠 빙크(Franz Vinck)와도 갈등이 생겼다. 빈센트는 외젠 시베르트(Eugène Siberdt) 교수의 석고상 드로잉 수업에 참석하는데, 거기서마저 윤곽선을 제대로 그려야 한다는 시베르트의 지도를 따르지 않아 갈등을 빚었다. 밀로의 비너스를 그리는 수업시간에 반 고흐가 플랑드르 농부 여인의 벌거벗은 상체를 그리는 모습을 본 시베르트는 크레용으로 반 고흐의 캔버스를 힘주어 수정하다가 종이를 찢었다. 반 고흐는 격렬한 분노를 터뜨리며 시베르트를 향해 "당신은 젊은 여성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는게 분명하군, 젠장! 여자란 자고로 허리, 엉덩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골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야!"라고 소리쳤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후 빈센트는 수업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고 파리로 떠났다.[107] 그로부터 한달쯤 지난 3월 31일, 교수진은 반 고흐를 포함한 17명의 학생들을 유급시키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시베르트가 반 고흐를 추방시켰다는 이야기는 낭설이다.[108]

파리 시기 (1886~1888)

푸른빛이 감도는 파스텔 톤의 그림으로, 남자가 오른쪽을 향해 테이블에 앉아 손과 유리잔을 올려놓고 있다. 그는 코트를 입고 있다. 배경에는 창문들이 보인다.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가 1887년에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 종이에 파스텔.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존 러셀이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스케치》 다섯 점.[109]

1886년 3월, 빈센트는 파리로 이사하여, 몽마르트르에 있는 동생 테오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며, 페르낭 코르몽의 화실에서 4월부터 5월까지 미술을 배웠다.[110] 거기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화가 존 러셀을 만났다. 러셀은 1886년 《반 고흐의 초상》을 그렸다.[111] 그 외에도 폴 세잔의 그림을 전시하는 유일한 장소였던 줄리앙 탕기의 미술용품점에서 에밀 베르나르, 루이 앙크탱,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툴루즈로트레크는 파스텔로 반 고흐의 초상화를 그렸다.[110] 줄리앙 탕기의 가게에서는 같은 해에 조르주 쇠라폴 시냐크점묘화신인상주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테오는 몽마르트르 대로에 있는 자신의 화랑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계속 수집했지만, 빈센트는 이런 새로운 종류의 화풍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112]

빈센트와 테오는 6월에 르삑 54번지에 있는 더 큰 아파트로 이사했다.[113] 빈센트는 파리에 살면서 친구와 지인들의 초상화, 정물화, 그리고 물랭 드 라 갈레트, 몽마르트르, 아니에르, 센 강 등 여러 풍경화를 그렸다. 안트베르펜에서 시작된 우키요에 목판화에 대한 관심은 점점 깊어져, 수백 점의 목판화를 수집해 파리의 작업실 벽을 장식하기도 했다. 일본풍 그림에도 도전하여 잡지 《파리 일뤼스트르》에 실린 게이사이 에이센의 작품 《오이란》그림의 모작을 그리기도 했다.[114] 반 고흐와 잠시 연인관계였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가 소유한 카페 탕부랭에서 일본 목판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 전시회에 반 고흐는 자신의 일본 목판화 모작(자포네즈리)를 전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86년 말, 테오는 빈센트와 함께 사는 것이 "거의 견딜 수 없는" 것이라 말할 정도로 갈등을 겪다가, 1887년 초에 화해했다.[110] 빈센트는 파리의 북서쪽 교외인 아니에르쉬르센으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시냐크를 알게 되었다. 빈센트가 점묘법 요소를 일부 받아들인 것도 이즈음의 일이었다. 점묘법은 캔버스에 수많은 작은 색점을 찍어 멀리서 보면 색이 시각적으로 혼합되어 보이는 효과를 내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파란색과 주황색과 같은 보색이 만들어내는 생생한 대비를 강조한다.[95][110]

들라리바렛(Delareybarette) 미술관에서 아돌프 몽티셀리의 초상화를 본 후로부터, 더 밝은 색채와 대담한 붓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1888년 그린 《생트마리의 바다》에서 잘 드러난다.[115][116] 2년 후, 빈센트와 테오는 몽티셀리의 그림에 관한 책을 출판하고 비용을 지불했으며, 그의 작품을 몇 점 수집하기도 했다.[117]

아니에르쉬르센에 있는 동안 빈센트는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포함하여 공원, 식당 등 여러 풍경화를 그렸다. 1887년 11월 테오와 빈센트는 파리에 막 도착한 폴 고갱과 친구가 되었다.[118] 그해 말에는 베르나르, 앙크탱, 툴루즈로트레크와 함께 몽마르트르의 43번가 드 클리시 거리에 있는 그랑부용 레스토랑 뒤 샬레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베르나르는 이 전시회가 파리의 다른 어떤 전시회보다 앞서 있었다고 썼다.[119] 베르나르와 앙크탱은 여기서 처음으로 그림을 판매했고, 빈센트는 폴 고갱과 작품을 교환했다. 이들은 전시회에서 예술과 사회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갔는데, 카미유 피사로,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와 같은 전시회 방문객들도 이 논의에 참여했다. 1888년 2월, 2년 동안 200점 이상의 그림을 그린 빈센트는 요양을 위해 파리를 떠났다. 출발 몇 시간 전, 테오와 함께 쇠라의 화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했다.[120]

예술적 돌파구

아를 (1888–89)

파란 하늘 아래 커다란 집
노란 집》, 1888년경.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독주로 인해 몸이 망가지고 흡연으로 인한 기침에 시달리던 1888년 2월, 반 고흐는 아를로 안식처를 찾아 떠났다.[14] 그는 예술가 공동체를 세우려는 생각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덴마크 화가 크리스티안 무리에르페테르센이 두 달 동안 그와 같이 지냈는데, 처음에 반 고흐는 아를이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편지에서 그는 이곳을 외국처럼 묘사했다. "주아브병, 사창가, 첫 영성체를 받으러 가는 사랑스러운 아를 소녀, 위험한 코뿔소처럼 보이는 사제복을 입은 사제,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121]

반 고흐의 생애 중 가장 많은 작품을 제작한 때가 아를에서 지내던 이 시기였다. 그는 200점의 유화와 100점 이상의 소묘 및 수채화를 완성했다.[122] 빈센트는 현지의 시골 풍경과 빛으로부터 힘을 얻었으며, 이 시기의 작품들은 노란색, 울트라마린, 연보라 색조가 풍부하다. 수확 장면, 밀밭, 그리고 그 지역의 전형적인 시골 풍경을 그린 작품들이 대부분이며, 그중에는 1888년 10월 4일 폴 고갱, 에밀 베르나르, 샤를 라발 등과 작품을 교환하기 위해 퐁타방으로 보낸 7점의 캔버스 중 하나인 《오래된 방앗간》(1888)도 있다.[123]

1888년 3월, 반 고흐는 "원근법 틀"을 사용하여 풍경화를 제작했으며, 그중 세 작품을 앙데팡당전 연례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4월에는 인근 퐁비에유에 살고 있던 미국 화가 닷지 맥나이트의 방문을 받았다.[124][125]

1888년 5월 1일, 반 고흐는 아를의 라마르틴 광장 2번지에 있는 방 4개를 임대하는 계약을 맺었으며, 이곳을 나중에 《노란 집》으로 그렸다.[126] 가구가 없는 이 방의 월세는 15프랑이었으며, 몇 달 동안 비어 있는 상태였다.[127] 반 고흐가 노란 집에 완전히 입주하기 전에 가구를 갖춰야 했기 때문에, 1888년 5월 7일 카렐 호텔에서 카페 드 라 가르(역전 카페)로 거처를 옮겼다.[128] 그는 노란 집의 주인인 조제프와 그의 처 마리 지누와 친구가 되었고, 그 집을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었다.[129] 반 고흐는 노란 집을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갤러리로 꾸미고자 했다. 반 고흐는 《반 고흐의 의자》(1888), 《아를의 방》(1888), 《밤의 카페》(1888), 《밤의 카페 테라스》(1888년 9월),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1888), (1888) 등을 그렸는데, 이 그림들은 모두 《노란 집을 위한 장식》을 위한 것이었다.[130]

반 고흐는 《밤의 카페》에 대해 "카페는 사람이 자신을 망치거나, 미치거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장소라는 아이디어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라고 썼다.[131] 6월에 생트마리드라메르를 방문했을 때, 그는 주아브병 하사관인 《폴 외젠 미리에》에게 그림을 가르쳤으며[132]바다 위의 배들과 마을》을 그렸다.[133] 맥나이트는 반 고흐에게 때때로 퐁비에유에 머물던 벨기에 화가 외젠 보슈를 소개해주었고, 두 사람은 7월에 서로의 작업실을 방문했다.[132]

고갱의 방문 (1888)

갈색 코트를 입고 의자에 앉아 왼쪽을 향한 붉은 수염의 남자가 오른손에 붓을 들고 커다란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고 있다.
폴 고갱, 《해바라기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 1888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고갱이 1888년 아를을 방문하기로 동의했을 때, 반 고흐는 그와 우정을 쌓고 자신의 예술가 공동체 구상을 실현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반 고흐는 고갱의 도착을 준비하며 일주일 동안 네 가지 버전의 《해바라기》를 그렸다.[134]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과 함께 우리만의 작업실에서 살기를 희망하며, 작업실을 위한 장식을 만들고 싶다. 커다란 해바라기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말이다."라고 썼다.[135]

보슈가 다시 방문했을 때, 반 고흐는 그의 초상화와 습작인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 시인》을 그렸다.[136][note 1]

고갱의 방문을 준비하면서 반 고흐는 역 우편 감독관인 조제프 룰랭의 조언에 따라 침대 두 개를 샀으며, 그의 초상화도 그렸다. 9월 17일, 그는 아직 가구가 거의 없는 노란 집에서 첫날밤을 보냈다.[138] 고갱이 아를에서 그와 함께 살며 작업하기로 승낙하자, 반 고흐는 《노란 집을 위한 장식》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아마도 그가 시도한 가장 야심 찬 작업이었을 것이다. [139] 그는 《반 고흐의 의자》와 《폴 고갱의 안락의자》를 완성했다.[140]

반 고흐의 간곡한 부탁 끝에 고갱은 10월 23일 아를에 도착했고, 11월에는 두 사람은 함께 그림을 그렸다. 고갱은 《해바라기의 화가》에서 반 고흐를 묘사했으며, 반 고흐는 고갱의 제안에 따라 기억에 의존해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상상력에 의한" 그림 중에는 《에턴 정원의 추억》이 있다.[141][note 2] 그들의 첫 공동 야외 작업은 알리스캉에서 이루어졌으며, 여기서 펜던트의 작품인 《알리스캉》을 제작했다.[142] 고갱이 방문 기간 동안 완성한 유일한 초상화는 반 고흐를 그린 것이었다.[143]

반 고흐와 고갱은 1888년 12월 몽펠리에를 방문하여 파브르 미술관에서 귀스타브 쿠르베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들을 감상했다.[144] 이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고갱을 존경했고 대등하게 대우받기를 원했지만, 고갱은 오만하고 지배적인 태도를 보여 반 고흐를 좌절시켰다. 그들은 자주 다투었다. 반 고흐는 고갱이 자신을 버리고 떠날까봐 점점 두려워했고, 반 고흐가 "극심한 긴장" 상태라고 묘사한 상황은 급격히 위기으로 치달았다.[145]

아를의 병원 (1888년 12월)

자해 사건에 관한 19세기 신문 기사 일부의 사진
반 고흐의 자해 사건을 기록한 1888년 12월 30일 자 현지 신문 기사[146]
레이 박사의 초상》, 1889년 1월, 푸시킨 미술관. 레이 박사가 소설가 어빙 스톤을 위해 반 고흐의 귀 손상 부위를 스케치하여 작성한 메모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된 정확한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고갱은 15년 후, 그날 밤 신체적으로 위협적인 행동이 몇 차례 있었다고 말했다.[147] 그들의 관계는 복잡했으며 테오가 고갱에게 돈을 빚지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 고갱은 고흐 형제가 자신을 경제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의심했다.[148] 빈센트가 고갱이 떠날 계획임을 눈치챘을 가능성이 크다.[148] 다음 날에는 폭우가 쏟아져 두 남자는 노란 집에 갇혀 있게 되었다.[149] 고갱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산책하러 나간 뒤 반 고흐가 뒤따라와 "면도날을 손에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149] 하지만, 이 진술은 입증되지 않았다.[150] 고갱은 그날 밤 노란 집에 없었을 것이 거의 확실하며, 호텔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크다.[149]

1888년 12월 23일 저녁, 고갱과의 말다툼 후,[151] 반 고흐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환청을 들은 듯하며, 면도날로 왼쪽 귀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잘라내어[note 3] 심한 출혈을 일으켰다.[152] 그는 상처를 붕대로 감고 잘린 귀를 종이에 싸서, 자신과 고갱이 자주 가던 사창가의 한 여성에게 전달했다.[152] 반 고흐는 다음 날 아침 경찰관에 의해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155][156] 수련의였던 펠릭스 레이의 치료를 받았다. 잘린 귀도 병원으로 가져왔지만, 레이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고 판단해 접합 수술을 시도하지 않았다.[149] 반 고흐 연구가이자 미술사학자인 베르나데트 머피는 가브리엘 베를라티에라는 여성의 실체를 밝혀냈다.[157] 그녀는 1952년 아를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녀의 후손들은 (2020년 기준) 여전히 아를 외곽에 살고 있다. 어린 시절 "가비"라고 불린 가브리엘은 반 고흐가 그녀에게 귀를 건넸을 당시 그 사창가와 다른 현지 시설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17세 소녀였다.[151][158][159]

반 고흐는 그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며, 이는 그가 급성 정신적 붕괴를 겪었음을 시사한다.[160] 병원 진단명은 "전신 섬망을 동반한 급성 조증"이었고,[161] 며칠 후 현지 경찰은 그를 입원 치료시키라고 명령했다.[162][163] 고갱은 즉시 테오에게 알렸는데, 테오는 12월 24일 막 오랜 친구인 안드리스 봉어르의 누이 요하나에게 청혼한 상태였다.[164] 그날 저녁 테오는 아를행 야간 열차를 탔다. 그는 크리스마스 당일에 도착하여 반쯤 정신이 들어 보이는 빈센트를 위로했다. 그날 저녁 그는 파리로 돌아갔다.[165]

치료 첫날 동안 반 고흐는 여러 번 고갱을 찾았으나 만날 수 없었다. 고갱은 사건을 담당하는 경찰관에게 "부탁입니다, 경관님, 이 남자를 아주 조심스럽게 깨워주시고, 만약 저를 찾는다면 제가 파리로 떠났다고 말해주십시오. 저를 보는 것이 그에게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라고 요청했다.[166] 고갱은 아를을 떠났고 다시는 반 고흐를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1890년 고갱은 앤트워프에 공동 작업실을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편, 병원을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마리 지누와 룰랭도 있었다.[167]

비관적인 진단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는 회복되어 1889년 1월 7일 노란 집으로 돌아왔다.[168] 그는 다음 한 달 동안 환각과 독살에 대한 망상에 시달리며 병원과 집을 오갔다.[169] 3월에 지누 가족을 포함한 마을 주민 30명이 그를 "붉은 머리의 미치광이"라고 부르며 탄원서를 제출하자 경찰은 그의 집을 폐쇄했고,[170] 반 고흐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폴 시냐크는 3월에 그를 두 번 방문했다.[171] 4월에 자신의 집이 홍수로 그림들이 손상되자 반 고흐는 레이 박사 소유의 방으로 이사했다.[172] 두 달 후, 그는 아를을 떠나 생레미드프로방스에 있는 요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했다. 이 무렵 그는 "가끔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휩싸이기도하고, 때로는 시간의 베일과 상황의 숙명이 한 순간 찢어지는 듯한 순간이 온다"라고 썼다.[173]

반 고흐는 1889년에 그린 《레이 박사의 초상》을 레이에게 주었다. 레이는 그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닭장을 수리하는 데 썼고, 나중에는 남에게 줘 버렸다.[174] 이 초상화는 푸시킨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6년 기준으로 5,000만 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175]

생레미 (1889년 5월 – 1890년 5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화면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풍경화. 왼쪽 전경에는 어둡고 뾰족한 사이프러스 나무가 화면 하단에서 상단까지 뻗어 있다. 왼쪽에는 마을 집들과 높은 첨탑이 있는 교회가 산맥 발치에 모여 있다. 하늘은 짙은 파란색이다. 오른쪽 상단에는 빛의 후광에 둘러싸인 노란 초승달이 있다. 크고 작은 밝은 별들이 많이 있으며 각각 소용돌이치는 후광에 둘러싸여 있다. 하늘 중앙을 가로질러 은하수가 이중 소용돌이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6월. 뉴욕 뉴욕 근대미술관

반 고흐는 1889년 5월 8일 개신교 목사인 간병인 프레데리크 살과 함께 생폴드모졸 요양원에 입원했다. 생레미에 위치한 생폴 요양원은 과거 수도원으로, 아를에서 30km 이내의 거리에 있으며, 전직 해군 의사인 테오필 페이롱이 운영하고 있었다. 반 고흐는 창살이 있는 방 두 개를 썼는데, 그중 하나를 작업실로 사용했다.[176] 이 요양원과 그 정원은 그의 그림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그는 《요양원의 현관》과 《생레미》(1889년 9월) 같은 병원 내부 모습과 《라일락 덤불》(1889년 5월) 같은 정원 그림을 여러 점 그렸다. 이 시기의 일부 작품은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표현이 특징이다. 그는 감독 하에 짧은 산책을 허가받았고, 그동안 사이프러스 나무와 올리브 나무를 그렸다. 여기에는 《위에서 본 농부와 골짜기》, 《알피유 산맥을 배경으로 한 올리브 나무》(1889), 《사이프러스 나무》(1889),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1889), 《밤의 프로방스 시골길》(1890) 등이 포함된다. 1889년 9월에는 《아를의 방》의 두 가지 새로운 버전과 《정원사》를 제작했다.[177]

요양원 바깥 출입이 금지되면서 반 고흐는 소재 부족을 겪었다. 대신 장프랑수아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과 《정오의 휴식》 등 다른 예술가들의 그림을 재해석하는 작업과 자신의 이전 작품들을 변주하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반 고흐는 쥘 브르통, 귀스타브 쿠르베, 밀레의 사실주의를 존경했으며,[178] 자신의 모작을 음악가가 베토벤을 해석하는 것에 비유했다.[179]

그의 《죄수들의 원형 보행》(1890)은 귀스타브 도레(1832–1883)의 인그레이빙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트랄보는 그림 중앙에서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는 죄수의 얼굴이 반 고흐 자신이라고 주장하지만,[180] 얀 훌스커는 이를 부정한다.[181]

1890년 2월에서 4월 사이, 반 고흐의 정신병이 심하게 재발하였다. 우울증에 빠져 글조차 쓸 수 없었지만, 이 시기에도 약간의 그림과 소묘는 할 수 있었다.[182] 그는 나중에 테오에게 "기억에 의존해... 북쪽을 회상"하는 몇 점의 소형 그림을 그렸다고 썼다.[183] 그중 하나가 《눈 속에서 땅을 파는 두 농부 여인》이다. 훌스커는 이 그림들이 이 시기에 반 고흐가 작업한 풍경과 인물을 묘사한 많은 소묘와 습작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 짧은 시기가 반 고흐의 병이 그의 작품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유일한 시기였다고 언급하였다.[184] 반 고흐는 어머니와 동생에게 옛 스케치를 바탕으로 새로운 그림 작업을 할 수 있도록 1880년대 초에 그렸던 소묘와 거친 스케치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185] 이 시기에 속하는 《영원의 문》(슬픔에 잠긴 노인)은 훌스커가 "오래전 과거에 대한 또 다른 분명한 기억"이라고 묘사한 색채 습작이다.[186][187] 미술 평론가 로버트 휴즈에 따르면, 그의 후기 작품들은 "간결함과 우아함을 갈망하는" 화가로서의 기량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준다.[121]

조카가 태어난 후 반 고흐는 "나는 곧바로 조카의 침실에 걸어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흰 《꽃피는 아몬드 나무》다."라고 썼다.[188]

1890년 전시와 인정

알베르 오리에는 1890년 1월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서 그의 작품을 찬양하며 그를 "천재"라고 묘사했다.[189] 2월에 반 고흐는 1888년 11월 지누 부인이 두 화가를 위해 포즈를 취했을 때 고갱이 그렸던 목탄 스케치를 바탕으로 《아를의 여인》(지누 부인)의 다섯 가지 버전을 그렸다.[190][note 4] 또한 2월에 반 고흐는 브뤼셀의 아방가르드 화가 단체인 Les XX(레 뱅, 20인회)로부터 연례 전시에 참여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개막 만찬에서 Les XX의 회원인 앙리 드 그루가 반 고흐의 작품을 모욕했다. 로트레크는 사과를 요구했고, 시냐크는 로트레크가 진다면 자신이 계속해서 반 고흐의 명예를 위해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드 그루는 무례함에 대해 사과하고 단체를 떠났다.[191]

1890년 3월 20일부터 4월 27일까지 반 고흐는 샹젤리제 거리의 파리 시관에서 열린 제6회 앙데팡당전에 참여했다. 반 고흐는 10점의 그림을 출품했다.[192] 파리에서 앙데팡당전이 열리는 동안 클로드 모네는 반 고흐의 작품이 전시회에서 최고라고 말했다.[193]

오베르쉬르우아즈 (1890년 5월–7월)

《오베르의 레 베스노》, 1890. 마드리드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화가가 사망하기 몇 주 전에 그려졌다.

1890년 5월, 반 고흐는 생레미의 병원을 떠나 파리 교외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있는 폴 가셰 박사와 그의 동생 테오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해 거처를 옮겼다. 가셰는 아마추어 화가였으며 여러 다른 예술가들을 치료한 적이 있었는데, 카미유 피사로가 그를 추천했다. 가셰에 대한 반 고흐의 첫인상은 "나보다 더 아프거나, 혹은 나만큼이나 아파 보였다"는 것이었다.[194]

화가 샤를프랑수아 도비니는 1861년에 오베르로 이주했으며, 뒤이어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오노레 도미에를 포함한 다른 예술가들도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1890년 7월, 반 고흐는 두 점의 《도비니의 정원》을 완성했는데, 그중 하나가 그의 마지막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195]

오베르의 교회》, 1890. 파리 오르세 미술관

생레미에서의 마지막 몇 주 동안 그의 생각은 "북방의 회상"으로 돌아갔다.[183] 그는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보낸 약 70일 동안 약 70점의 유화를 남겼는데, 그중 몇몇은 북부 지방의 풍경을 연상시킨다.[196] 1890년 6월, 그는 자신의 주치의였던 가셰 박사의 초상화를 몇점 그렸는데, 여기에는 《가셰 박사의 초상》과 그의 유일한 에칭 작품도 포함된다. 각각의 초상화에서는 가셰의 우울한 기질이 강조되어 표현된다.[197] 기타 《언덕 옆의 초가집》을 포함하여 미완성으로 추정되는 여러 그림들이 있다.[195]

7월에 반 고흐는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섬세한 노란색의 언덕을 배경으로 한 거대한 평원"에 몰입하게 되었다고 썼다.[198] 그는 밀이 아직 푸르고 어렸던 5월에 처음으로 그 들판에 매료되었다. 7월에 그는 테오에게 "요동치는 하늘 아래 광활한 밀밭"에 대해 묘사했다.[199]

그는 그것들이 자신의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나타내며, "이 그림들이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전원생활이 얼마나 건강하고 활력을 주는지를 알려줄 것"이라고 썼다.[200]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반 고흐의 마지막 유화 작품은 아니지만 1890년 7월의 작품이며, 훌스커는 이를 "우울함과 극도의 외로움"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였다.[201] 훌스커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 완성 이후에 그려진 오베르 시절의 유화 일곱 점을 확인했다.[202] 훌스커는 또한 이 시기 반 고흐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그림이 너무 많다는 점에 우려를 표명했다.[203]

사망

Someone의 사망을 알리는 19세기 신문 공고의 사진
1890년 8월 7일자 레코 퐁투아지앵(L'Écho Pontoisien)에 실린 반 고흐의 사망 기사

1890년 7월 27일(일요일), 37세의 반 고흐는 리볼버로 자신의 가슴을 쐈다.[204] 총격은 그가 그림을 그리던 밀밭이나 현지의 어느 헛간에서 일어났을 수 있다.[205] 총알은 갈비뼈에 맞아 굴절되어 가슴을 관통했지만, 장기에 뚜렷한 손상을 입히지 않고 아마도 척추에 걸려 멈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스로 걸어서 라부 여관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두 명의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그중 한 명인 가셰 박사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군의관으로 복무하여 총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빈센트는 아마도 밤 동안 가셰 박사의 아들 폴 루이 가셰와 여관 주인 아르튀르 라부의 간호를 받았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테오가 형의 곁으로 달려왔을 때 빈센트는 기운이 좋아 보였으나, 몇 시간 뒤 상처로 인한 감염이 악화되면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7월 29일 화요일 이른 새벽에 사망했다. 테오에 따르면 빈센트의 마지막 말은 "슬픔은 영원할 것이다"였다.[206][207][208][209]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무덤과 두 개의 묘비. 푸른 잎사귀 뒤로 빈센트와 테오 반 고흐의 유해가 안치된 오베르쉬르우아즈 묘지가 보인다. 왼쪽 비석에는 Ici Repose Vincent van Gogh (1853–1890)라고 적혀 있고, 오른쪽 비석에는 Ici Repose Theodore van Gogh (1857–1891)라고 적혀 있다.
오베르쉬르우아즈 묘지에 있는 빈센트와 테오의 묘

반 고흐는 7월 30일 오베르쉬르우아즈 시립 묘지에 묻혔다. 장례식에는 테오 반 고흐, 안드리스 봉어르, 샤를 라발, 루시앙 피사로, 에밀 베르나르, 줄리앙 탕기, 폴 가셰를 포함하여 가족, 친구, 지역 주민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테오는 매독을 앓고 있었고, 형의 죽음 이후 건강이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형을 잃은 슬픔에 잠긴 테오는 빈센트 사후 불과 6개월 만인 1891년 1월 25일 덴 돌더에서 사망하여 위트레흐트에 묻혔다.[210] 1914년, 요하나 반 고흐봉어르는 테오의 시신을 파묘하여 위트레흐트에서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빈센트 묘지 옆으로 이장했다.[211]

반 고흐의 질병의 성격과 그것이 그의 작품에 미친 영향에 대해 수많은 논쟁이 있었으며, 많은 사후 진단이 제안되었다. 일반적인 합의는 반 고흐가 중간 중간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간헐적으로 정신병 증상이 나타나는 상태였다는 것이다.[212] 페리는 1947년에 처음으로 양극성 장애를 제안했는데,[213] 정신과 의사 헴필과 블루머도 이를 지지했다.[214][215] 생화학자 윌프레드 아널드는 양극성 장애와 창의성이 관련 있다는 대중적인 믿음이 거짓일 수 있음을 지적하며, 증상이 급성 간헐성 포르피린증과 더 일치한다고 반박했다.[212] 우울증 발작을 동반한 측두엽 뇌전증 또한 제안되었다.[215] 진단이 무엇이든 간에, 그의 상태는 영양실조, 과로, 불면증, 알코올로 인해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15]

화풍 및 작품

예술적 발전

론강 위로 밝은 별들이 빛나는 어두운 별밤의 전경. 강 건너 멀리 밝은 빛을 내는 건물들이 론강의 어두운 물에 반사되고 있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1888. 오르세 미술관, 파리

반 고흐는 학교에 다닐 때 수채화를 그렸으나, 현존하는 작품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남아 있는 일부 작품도 진위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다.[216] 성인이 되어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했을 때 그의 실력은 초보적이었다. 1882년 초,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한 미술 갤러리를 운영하던 그의 삼촌 코르넬리스 마리뉘스는 헤이그를 묘사한 소묘를 의뢰했으나, 반 고흐의 작품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마리뉘스는 주제를 상세히 지정하며 두 번째 의뢰를 맡겼으나, 결과에 다시 한번 실망했다. 이후 더 이상의 의뢰는 없었다. 그럼에도 반 고흐는 굴하지 않고 여러가지 셔터와 다양한 드로잉 재료를 사용하여 화실에서 조명 실험을 이어갔다. 그는 1년 넘게 단일 인물상 연구에 매달렸는데, 흑백으로 된 매우 정교한 습작들[note 5]은 당시 비판만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초기 걸작으로 인정받게 되었다.[218]

1882년 8월, 테오가 빈센트에게 돈을 보내주어 야외 사생 재료를 구입하였다. 빈센트는 이제 "새로운 활력을 가지고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썼다.[219] 1883년 초부터 그는 여러 명이 등장하는 구성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이 중 일부를 사진으로 찍어두기도 했으나, 동생 테오가 생동감과 신선함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자 이를 파괴하고 유화로 방향을 돌렸다. 반 고흐는 요한 헨드릭 바이센브루흐베르나르 블롬메르스 같은 유명한 헤이그 화파 예술가들을 찾아갔으며, 그들뿐만 아니라 헤이그 화파 2세대 화가인 테오필 드 복헤르만 요하네스 판 데르 베엘레로부터 기술적인 조언을 얻었다.[220] 그는 드렌터주에서 잠시 머문 후 뉘넌으로 옮겨 여러 점의 대작을 시작했으나 대부분을 유실되어, 《감자 먹는 사람들》과 그 연작들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220]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을 방문한 후, 반 고흐는 네덜란드 거장들, 특히 렘브란트프란스 할스의 빠르고 경제적인 붓질에 감탄하였다.[221][note 6] 그는 자신의 결점 중 많은 부분이 경험과 기술적 숙련도의 부족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고, 회화 기법을 배우기 위해[220] 1885년 11월에 안트베르펜으로, 이후에는 파리로 여행을 떠났다.[222]

초록색의 구불구불한 올리브 나무들이 있는 정방형 그림. 배경에는 완만한 푸른 언덕이 있고 위쪽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떠 있다.
알피유 산맥을 배경으로 한 올리브 나무》, 1889. 뉴욕 근대미술관, 뉴욕

테오는 《감자 먹는 사람들》이 현대적인 스타일에 적합하지 않게 색조가 너무 어둡다고 비판했다.[223] 1886년에서 1887년 사이 파리에 머무는 동안 반 고흐는 새롭고 더 밝은 팔레트를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탕기 영감의 초상화》 (1887)은 더 밝은 색채를 사용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주며, 개인적인 화풍이 진화했다는 증거이다.[224] 샤를 블랑의 색채 논문은 그에게 큰 흥미를 주었고 보색을 활용하게 되었다. 반 고흐는 색채의 효과가 단순한 묘사 이상이라고 믿게 되었으며, "색채는 그 자체로 무언가를 표현한다"고 말했다.[225][226] 로버트 휴스에 따르면, 반 고흐는 색채가 "심리적이고 도덕적인 무게"를 지닌다고 인식했다. 이는 그가 "인류의 끔찍한 탐욕을 표현"하고자 했던 작품 《밤의 카페》의 현란한 빨강과 초록에서 잘 드러난다.[227] 노란색은 감정적인 진실을 상징했기에 그에게 가장 중요했다. 그는 노란색을 햇빛, 생명, 그리고 신의 상징으로 사용했다.[228]

반 고흐는 농촌 생활과 자연의 화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229] 아를에서의 첫 여름 동안 그는 새로운 색채를 사용해 풍경과 전통적인 농촌 생활을 그렸다.[230] 자연의 이면에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그의 믿음은, 예술을 통해 그 힘이나 자연의 정수를 포착하려는 시도로 이어졌으며, 때로는 상징을 사용하기도 했다.[231] 처음에 장프랑수아 밀레를 모사하면서, 《씨 뿌리는 사람》를 육체 노동의 영웅주의에 대한 토마스 칼라일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이라고 해석하고,[232] 종교적 신념을 반영하여 씨 뿌리는 사람이 뜨거운 태양 아래 생명을 뿌리는 그리스도를 표현한다고 믿었다.[233] 그는 이러한 주제와 모티프로 그가 자주 되돌아와 재작업하고 발전시켰다.[234] 그의 꽃 그림들은 상징주의로 가득 차 있지만, 전통적인 기독교 도상학을 사용하는 대신 태양 아래서 살아가는 삶과 노동이 삶의 알레고리가 되는 자신만의 도상학을 만들어냈다.[235] 아를에서 봄날의 꽃들을 그리며 밝은 햇빛을 포착하는 법을 익히고 자신감을 얻은 그는 비로소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릴 준비가 되었다.[225]

한 명은 우산을 들고 다른 한 명은 꽃을 든 두 여성을 근접 촬영한 정방형 그림. 그들 뒤로는 들꽃이 가득한 넓은 화단에서 꽃을 따고 있는 젊은 여성이 보인다. 그들은 강가에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정원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턴 정원의 추억》, 1888. 에르미타시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반 고흐는 스스로 "현실의 가면"[236]이라는 범주 안에 머물거나, 지나치게 양식화된 작품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237] 그는 나중에 《별이 빛나는 밤》의 추상성이 너무 지나쳤고 현실이 너무 "배경화되었다"고 썼다.[237] 로버트 휴스는 이를 극단적인 환상적 황홀경의 순간으로 묘사한다. 별들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있고, 하늘 위의 움직임은 땅 위의 사이프러스의 움직임과 조화를 이루며, 화가의 비전은 "두껍고 강조된 물감의 플라스마"로 변환된다.[238]

1885년부터 1890년 사망할 때까지 반 고흐는 자신의 개인적인 비전을 반영하면서도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작품 세계(oeuvre)을 구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239] 그는 진정한 회화란 색채, 원근법, 붓질을 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블랑의 스타일 정의에 영향을 받았다. 반 고흐는 스스로 완전히 마스터했다고 생각하는 그림들에 "의도적"이라는 단어를 적용하여, 습작과 구분하였다.[240] 그는 수많은 습작 연작을 그렸는데,[236] 그 대부분은 정물화였으며 대부분 색채 실험이나 친구들을 위한 선물로 제작되었다.[241] 아를에서의 작업은 그의 작품 전체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작품들은 《씨 뿌리는 사람》, 《밤의 카페》, 《에턴 정원의 추억》,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넓은 붓질, 독창적인 원근법, 색채, 윤곽 및 디자인을 갖춘 이 그림들은 그가 추구했던 스타일을 대표한다.[237]

주요 연작

잘 차려입은 여성이 자신의 오른쪽(관람객의 왼쪽)을 향해 앉아 있다. 무릎 위에 책 두 권이 놓여 있으며, 노란색 배경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어두운 옷을 입고 있다.
아를의 여인》, 1888년 11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반 고흐의 양식적 발전은 대개 그가 거주했던 장소와 그 시기와 관련이 있다. 그는 시종일관 현지의 문화와 조명 조건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적 관점을 유지했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진화는 느렸지만,자신의 회화적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반 고흐는 새로운 시각적 자극에 노출되고 이를 통해 기술적 기량을 발전시키기 위해 자주 거처를 옮겼다.[242] 미술사학자 멜리사 맥퀼란은 이러한 이동이 후기의 양식적 변화를 반영하며, 반 고흐가 갈등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자 이상주의적인 예술가로서 마주친 벽을 타개하기 위해 이사를 택했다고 본다.[243]

초상화

반 고흐는 초상화가 자신의 가장 큰 관심사라고 말했다. 1890년에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열정을 쏟는 것은 초상화, 즉 현대적인 초상화이다"라고 썼다.[244] 그것은 "회화에서 나를 깊이 감동시키고 무한함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다.[241][245] 그는 여동생에게 오래도록 남을 초상화를 그리고 싶으며, 사진 같은 사실주의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색채를 사용하여 모델의 감정과 성격을 포착하고 싶다고 썼다.[246] 그러나 정작 테오 반 고흐안톤 반 라파르트, 에밀 베르나르 등, 반 고흐와 가장 가까웠던 이들은 초상화로 남겨지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의 초상화는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었다.[247]

반 고흐는 아를의 우체부 조제프 룰랭의 가족을 여러 번 그렸다. 다섯 가지 버전의 《라 베르쇠즈》(자장가)에서 반 고흐는 아우구스티네 룰랭이 보이지 않는 아기의 요람을 흔드는 줄을 조용히 잡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반 고흐는 이 작품을 해바라기 그림들 사이에 배치하는 삼면화의 중앙 이미지로 계획했다.[248]

자화상

매우 강렬하고 집중된 시선과 붉은 수염을 가진 빈센트 반 고흐의 왼쪽 모습.
자화상》, 1889년 9월. 오르세 미술관

반 고흐는 1885년에서 1889년 사이에 43점 이상의 자화상을 제작했다.[249][note 7] 자화상은 보통 1887년 중반 파리에서 그린 것들처럼 연작으로 완성되었으며, 사망 직전까지 계속되었다.[250] 일반적으로 자화상은 그가 타인과 어울리기를 꺼리거나 모델이 부족할 때 자신을 모델로 삼아 만든 습작이었다.[241][251]

반 고흐의 자화상은 높은 수준의 자기 성찰을 반영한다.[252] 많은 자화상들이 그의 삶에서 중요한 시기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예를 들어, 1887년 중반의 파리에 그린 자화상(우측)은 그가 클로드 모네, 폴 세잔, 시냐크 등 아방가르드 스타일을 인지하게 된 시점에 그려졌다.[253]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에서는 굵은 물감의 결이 후광처럼 캔버스 밖으로 뻗어 나간다. 이는 그 시기 가장 유명한 자화상 중 하나로, "고도로 조직된 리듬감 있는 붓질과 신인상주의에서 유래한 참신한 후광을 지닌, 반 고흐 스스로 '목적 있는'이라고 불렀던 작품"이다.[254]

자화상들은 자기 광범위한 관상학적 표현을 담고 있다.[249] 반 고흐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가 대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헝클어진 모습, 면도를 하지 않거나 방치된 수염, 깊게 패인 눈, 힘없는 턱, 혹은 빠진 치아 등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두툼한 입술, 긴 얼굴, 돌출된 두개골, 혹은 날카롭고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보여준다. 그의 머리카락은 때때로 활기찬 붉은빛으로, 다른 때는 어두운 재색으로 묘사된다.[249]

반 고흐의 자화상은 양식적으로 다양하다. 1888년 12월 이후에 그려진 자화상들은 선명한 색채의 강한 대비로 그의 창백하고 초췌한 피부를 부각시킨다.[251] 어떤 것은 수염이 있고, 어떤 것은 없다. 자신의 귀를 자른 직후에 처치된 초상화에서는 붕대를 감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자신을 화가로 묘사한 것은 불과 몇 점뿐이다.[249] 생레미에서 그린 것들은 오른쪽 머리, 즉 거울에 비친 자신을 그렸기 때문에 손상된 귀의 반대쪽이 나타난다.[255][256]

밝은 노란색 배경에 노란색 표면 위 해바라기가 꽂힌 도자기 꽃병.
《정물: 열네 송이의 해바라기가 있는 꽃병》, 1888년 8월. 내셔널 갤러리, 런던

반 고흐는 장미, 라일락 덤불, 붓꽃, 해바라기 등 꽃이 있는 풍경화나 정물화를 여러 점 그렸다. 일부는 색채 언어에 대한 관심과 일본의 우키요에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259] 해바라기 연작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연작은 1887년 파리에서 그려진 것으로 땅에 놓여 시든 꽃들을 묘사한다. 두 번째 연작는 1년 후 아를에서 완성되었으며 이른 아침 햇살 속에 놓인 꽃병에 담긴 꽃다발이다.[260] 두 세트 모두 물감을 두껍게 겹쳐 칠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따르면 이는 "씨앗의 질감"을 연상시킨다.[261]

반 고흐가 이 연작에서는 평소의 관심사인 주관성과 감정을 그림에 담으려고 하지 않았다. 두번째 연작은 곧 방문할 고갱에게 자신의 기술적 기량과 작업 방식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로 제작되었다.[143] 1888년의 그림들은 빈센트에게는 보기 드문, 낙관적인 시기에 만들어졌다. 빈센트는 1888년 8월 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부야베스를 먹는 마르세유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어. 커다란 해바라기를 그리는 일이라면 당연하겠지... 만약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면 열두 점 정도의 판넬이 나올 거야. 그러면 전체가 파란색과 노란색의 교향곡이 되겠지. 나는 매일 아침 해가 뜰 때부터 이 작업을 하고 있어. 꽃들이 빨리 시들어버려서 한 번에 다 해치워야 하거든.[262]

해바라기들은 고갱의 방문을 앞두고 벽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졌으며, 반 고흐는 아를에 있는 《노란 집》의 손님방 곳곳에 개별 작품들을 배치했다. 고갱은 깊은 감명을 받았고 나중에 파리 버전 중 두 점을 구입했다.[143] 고갱이 떠난 후 반 고흐는 해바라기의 주요 두 버전을 삼면화의 날개 부분으로 구상하여, 브뤼셀에서 열린 Les XX 전시에 포함시켰다. 오늘날 이 연작의 작품들은 노란색의 병적인 함의와 노란 집과의 연관성, 붓질의 표현주의, 그리고 종종 어두운 배경과의 대비로 인해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로 평가받는다.[263]

사이프러스와 올리브

길가에 커다란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고, 두 사람이 걷고 있으며 뒤에는 마차와 말이 있는 그림. 배경에는 초록색 집이 있고 강렬한 별밤 아래 있다.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1890년 5월,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테를로

반 고흐는 자신을 매료시켰던 사이프러스를 15점의 작품에서 묘사하였다.[265] 그는 전통적으로 죽음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이 나무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231] 아를 시절의 사이프러스 연작은 들판의 방풍림처럼 멀리 있는 나무들을 모습으로 묘사 했으나, 생레미에 있을 때는 그것들을 전경으로 끌어들였다.[266] 빈센트는 1889년 5월 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사이프러스가 여전히 나를 사로잡고 있어. 나의 해바라기 캔버스들처럼 그것들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 그는 이어서 "사이프러스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선과 비율이 아름다워"라고 덧붙였다.[267]

1889년 중반, 여동생 빌의 요청으로 반 고흐는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의 작은 버전들을 여러 점 그렸다.[268] 이 작품들은 소용돌이치는 형태와 밀도 있게 칠해진 임파스토가 특징이며, 사이프러스가 전경을 압도하는 《별이 빛나는 밤》이 대표적이다.[265] 이 외에도 사이프러스를 다룬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사이프러스 나무》(1889), 《두 인물이 있는 사이프러스》(1889–90), 그리고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1890) 등이 있다.[269]

1889년의 마지막 6~7개월 동안 그는 올리브 나무 그림을 적어도 15점 그렸는데, 그는 이 주제가 까다로우면서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270] 이들 작품 중에는 《알피유 산맥을 배경으로 한 올리브 나무》 (1889)가 있으며, 반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에 대해 "드디어 올리브가 있는 풍경화를 갖게 되었다"고 썼다.[269] 생레미에 머무는 동안 반 고흐는 요양원 밖에서 시간을 보내며 올리브 숲의 나무들을 그렸다. 이 작품들에서 자연의 생명이 마치 자연계를 인격화한 것처럼 뒤틀리고 관절염에 걸린 듯이 묘사되는데, 휴스에 따르면 이는 "자연이 나타내는 연속적인 에너지 장"으로 가득 차 있다.[231]

과수원

꽃 피는 과수원 연작은 1888년 2월 반 고흐가 아를에 도착한 직후 완성한 초기 작품에 속한다. 14점의 그림들은 낙관적이고 즐거우며 싹트는 봄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그것들은 섬세하게 감성적인 이 그림들에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반 고흐는 신속하게 그렸으며, 인상주의 기법을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화풍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꽃 피는 나무의 일시성과 계절의 흐름은, 아를에서의 새로운 시작에 대한 그의 믿음 및 덧없음의 정서를 드러내는 듯하다. 그해 봄 나무들에 꽃이 만발했을 때, 그는 "이보다 더 일본적일 수 없는 모티프의 세계"를 발견했다고 한다.[271] 빈센트는 1888년 4월 21일 테오에게 10개의 과수원 그림과 "망쳐버린 커다란 벚나무 [그림] 하나"가 있다고 썼다.[272]

이 시기에 반 고흐는 그림자를 억제하고 마치 나무 자체가 빛의 근원인 것처럼—거의 성스러운 방식으로—묘사하여 빛의 사용을 마스터했다.[271] 이듬해 초 그는 《아를의 풍경, 꽃피는 과수원》을 포함한 또 다른 작은 과수원 연작을 그렸다.[273] 반 고흐는 남프랑스의 풍경과 식생에 매료되었으며 아를 근처의 농장 정원을 자주 방문했다. 지중해성 기후의 선명한 빛 속에서 그의 팔레트는 현저하게 밝아졌다.[274]

밀밭

어둡고 불길한 하늘 아래 중앙을 가로지르는 초록색 언덕이 있는 광활한 밀밭 그림.
먹구름 아래의 밀밭》, 1890,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반 고흐는 여러 차례 그림 여행을 떠나 아를 주변 풍경을 방문했다. 그는 그 지역의 수확, 밀밭 및 기타 농촌 명소들을 그렸는데, 여기에는 《오래된 방앗간》(1888)이 포함된다. 이 작품은 밀밭 너머로 접한 그림 같은 구조물을 묘사한다.[123] 반 고흐는 헤이그, 안트베르펜, 파리 등 여러 곳에서 창밖의 풍경을 그렸다. 이러한 작업은 생레미의 요양원 병실에서 본 풍경을 묘사한 《밀밭》 연작에서 절정에 달했다.[275]

많은 후기 작품들이 침울한 분위기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낙관적이며, 반 고흐가 사망할 때까지 명료한 정신 건강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몇몇 작품은 깊어지는 불안을 반영한다.[276][277] 1890년 7월 오베르에서 쓴 글에서 반 고흐는 자신이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섬세한 노란색의 언덕을 배경으로 한 거대한 평원"에 몰입해 있다고 말했다.[198]

반 고흐는 초록색의 어린 밀이 가득한 5월의 들판에 매료되었다. 그의 《하얀 집이 있는 오베르의 밀밭》은 노란색과 파란색의 더 절제된 팔레트를 보여주며 전원적인 조화의 느낌을 자아낸다.[278]

1890년 7월 10일경, 반 고흐는 테오에게 "요동치는 하늘 아래 광활한 밀밭"에 대해 썼다.[279]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화가의 마지막 나날의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 훌스커는 이 작품을 "위협적인 하늘과 불길한 까마귀가 있는 운명적인 그림"이라고 묘사한다.[201] 어두운 팔레트와 무거운 붓질은 위협적인 느낌을 전달한다.[280]

작품세계

홀랜드 시기

빈센트는 언급할만한 가치를 지닌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경탄해 마지않았던 옛 화가들의 그림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그 중의 몇 개의 작품들을 모사함으로써 미술에 대한 지식과 재주를 독학으로 익혔다. 그가 홀랜드에서 보낸 1880년-1885년 사이에 17세기에 활동했던 두 명의 네덜란드 화가가 그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주었다. 렘브란트프란스 할스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로부터 그는 다양한 갈색조, 회색조, 흑색조의 색채를, 음영이 뚜렷한 회화 기법을, 눈에 그대로 보이는 거친 붓자국이 있는 진하게 칠한 채색 기법을, 그만큼 더 강렬한 전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세부적인 묘사를 포기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옛 거장들이 그림들을 지나치게 세세하게 다루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아주 경탄해마지 않았고, 빈센트도 자신도 평생 동안 이 원칙을 고수했다.

내용적으로 반 고흐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주제, 즉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를 다루었다. 빈센트는 '홀랜드 시기'에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 그들의 가난한 오두막, 수공업자들을 그렸다. 정물화에서는 특이하게도 감자가 자주 발견된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그림에 진실될 것과 분위기, 감정 혹은 생각을 전달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런 요구가 자신이 모범으로 생각하는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충족된 것으로 생각했다.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경

이 시기에 제작된 가장 야심차고 유명한 그림은 1885년경에 그려진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그 그림에서는 소박한 식사를 하는 농부 가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빈센트는 그 그림으로 시골 사람들이 땅과 맺고 있는 상태와 가혹한 삶을 묘사하고자 했다. 그는 이 그림에 상당한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집단으로 묘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빠듯한 생활비에도 불구하고 모델들을 고용했고, 여러 장의 습작을 그렸다. 《감자 먹는 사람들》이후로 빈센트는 더 이상 여러 인물들이 배치된 작품을 그리지 않았고, 단 하나의 그림에 그처럼 많은 노력을 쏟아붓지도 않았다.

발전의 시기: 안트베르펜과 파리 시대

안트베르펜에서의 3개월 간의 체류 동안, 무엇보다도 1886-1888년에 걸친 파리 체류 기간 동안 빈센트는 새롭고 다양한 인상들에 노출되었다. 그 자신의 작업에서 실험의 시기가 시작되었으며, 그 실험은 궁극적으로 그의 화법에 중대한 변화로 귀결되었다.

파리에서 그는 그 당시에 중요하게 간주되었던 인상주의와 대면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 그는 인상주의를 이름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양식에 대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빈센트는 인상주의의 여러 요소를 자신의 회화에 받아들였다. 그는 좀 더 밝고 순수한 색채를 사용했고, 가는 선으로 그은 듯한, 점 모양의 특징을 지닌 붓 놀림으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그는 화면을 보색 관계를 이루는 색채로 구성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과 만남으로써 좀 더 대담해진 색채 사용으로의 방향 전환이 강화되었다. 주제상으로 보자면 그는 파리적 소재에 관심을 기울였다. 파리 주변의 시골에서도 그는 자주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에 인상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는 《봄날의 낚시》, 《클리시 다리》, 《아니에르의 다리 모습》, 《몽마르트르 언덕의 채소밭》 등이 있다.

《몽마르트 언덕의 채소밭》, 1887년

하지만 그의 예술적 발전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일본 판화와의 만남이었다. 1853년 일본은 국경을 개방했으며,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점점 더 판화를 찍은 종이가 유럽으로 전해졌다. 많은 미술가들이 전혀 새로운 미술에 열광을 했고, 빈센트롤도 매혹되었다. 그는 일본 채색 판화를 모으기 시작했고, 몇 개의 소재를 유화 작품으로 옮겨 제작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본의 미술관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들의 형상 원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실제적으로 그 이후부터 제작된 그의 그림에는 이런 저런 '일본적' 형상 원칙이 나타났다. 그림자의 부재, 가는 선으로 테두리가 둘러쳐진 '얕게' 채색된 화면, 이례적인 원근법, 풍경 속에서 아주 작게 묘사된 인물들이 그런 원칙들이었다.

아를의 방》, 1888년

아를의 방》이라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빈센트는 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적어 보냈다.

그림자가 제거되었고, 색채는 일본 목판화에서처럼 얕고 단순하게 칠해졌어.

1888년에 제작된 꽃이 만개한 과일나무 연작의 경우처럼 소재의 선택에서도 부분적으로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빈센트는 이 기간 동안 일본화를 접하고 관련 작품을 열렬히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화의 밝은 색채와 캔버스 공간의 사용, 그림에서 보인 선의 역할에 감탄했으며, 이러한 인상은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주었다. 이때 빈센트는 일본풍으로 약간의 그림을 그려 《프로방스 시골길의 하늘 풍경》, 《별이 빛나는 밤》,《해바라기》 등의 걸작들을 그렸다.[281]

아를(Arles) 시대

아를에서 빈센트는 파리 시절에 이론적으로 발전시켰지만 지금까지는 일관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죽을 때까지 본질적으로 유지했던 이 화법은 우리가 오늘날 빈센트에게서 '전형적' 이라고 느끼는 화법이다.

반 고흐는 남부 프랑스의 눈부신 색채에 대한 희망을 품고서 아를로 이주를 했다. 그는 편지에서 이주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붉은색과 초록색, 푸른색과 오렌지색, 짙은 노랑색과 보라색의 아름다운 대조를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야.

실제로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전체적인 효과에서 상호상승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보색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나란히 사용했던 순수하고, 강력한 색채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그는 대상의 자연적인 색을 벗어나 색채를 과장하거나, 그가 각각의 그림을 위해서 발전시킨 색채 체계에 적합하도록 사용했다. 빈센트의 그림에서는 초록색 하늘, 분홍색 구름, 짙은 청색의 길이 있다. 그 자신도 그것에 대해서 적고 있다.

나는 색채의 위치를 정하는 것에 있어서 자연으로부터 일련의 순서와 정확성을 받아들였어. 나는 무의미한 짓을 하지 않고,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을 세세하게 관찰하지. 내가 사용한 색이 내 그림에서 훌륭한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것이 사물의 색과 동일한 색인지하는 문제는 더 이상 내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눈부신 색과 강렬한 대조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의 그림은 결코 야하거나 벽보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나머지 색을 약화시키거나 결합시키는 중간 색조를 사용함으로써 조화로운 전체 효과를 만들어낸다.

밤의 카페

그 이외에도 색채는 빈센트 반 고흐에게는 상징적 기능도 지니고 있다. 《밤의 카페》(1888년)처럼 색채는 분위기를 표현해야만 한다고 한다.

나는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무시무시한 인간의 정열을 표현하려고 했어. 공간은 푸르고 붉으며 생기없는 노란색이지. 가운데에 초록색 당구대가 놓여 있고, 오렌지색과 초록색의 둥근 불빛을 만들어내는 레몬처럼 노란 4개의 램프가 있지.

반 고흐는 재빠르게, 즉흥적으로 그리고 나중에 커다랗게 수정을 하지 않은 채로 그림을 그렸다. 신속하게 그리는 그의 화법은 한 편으로는 그의 창작욕에서 나오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 아주 의식적으로 그것을 표현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그림에 더 많은 생기와, 강렬함과 직접성을 부여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좀 더 커다란 전체 효과를 위해서 소재를 단순화했다. 비록 그가 재빠르게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충동적으로 그리거나 도취해서 그리지도 않았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는 머릿속으로 그려보거나 여러 장의 스케치를 통해서 준비를 했다.

거의 언제나 그는 소재를 눈 앞에 두고서 그림을 그렸다. 그가 기억이나 생각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눈으로 본 것을 종종 심하게 변행을 시키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연에 충실한 상태였고, 추상으로 통하는 경계선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반 고흐는 물감을 희석하지 않은 채 걸죽하게 칠했으며, 가끔씩 물감을 튜브에서 짜서 직접 화폭에 바르기도 했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것을 인해서 그의 붓자국이 입체적으로 보였고, 반 고흐 특유의 붓놀림을 만들어 냈다. 매끄럽고, 윤곽선이 둘러쳐진 일본풍의 채색면 이외에도 빈센트는 이미 파리 시절에 색을 짧은 선 모양으로 나란히 칠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자신의 그림을 좀 더 생생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형상화하기 위해서 그는 생 레미 시절에는 이런 선을 율동적으로 구성하고, 물결 모양, 원 모양, 나선형 모양으로 배열하기 시작했다. 1889년에 제작된 자화상이나 1889년에 그려진 《별이 빛나는 밤》이 그것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빈센트는 각각의 화법을 소재와 연관지어서 선택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것이 반 고흐의 목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소재가 지닌 본질과 특성 그리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외젠 보슈(Eugène Boch)의 초상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이 그림에 내가 그에 대해서 느끼는 경탄을, 사랑을 담고 싶었어. 머릿속으로 나는 무한한 것을 그렸어. 나는 내가 지금까지 성취했던 것 중에서 가장 진한과 인상적인 파랑색으로 간단하게 배경을 그렸어. 그리고 이 간단한 구성을 통해서 빛나는 짙은 파란색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금발의 머리는 짙푸른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수수께끼와 같은 것을 지니게 되었어.

후기에 제작된 오베르의 풍경화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흐린 하늘 아래 한 없이 넓은 밭이 있고, 나는 슬픔과 극단적인 고독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주저하지 않았지.

화가는 형식과 색채를 변화시킴으로써 바라던 표현의 강렬함을 달성할 수 있었다. 형식의 경우에 반 고흐는 단순화를 향해 움직여 간 반면에 색채는 점점 강화시켰다.

그 밖에도 반 고흐는 다양한 상징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했다. 많은 그림에서 그는 언어를 통해서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전래된 상징 이외에 그는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상징 언어를 사용했다. 그 상징 언어의 의미는 그의 생애, 사고와 감정 세계에 대한 앎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스케치 판, 파이프, 양파, 봉랍이 있는 정물화에서 그는 그에게 도움이 되었던 물건들을 배열했다. 건강 지침서와 그 책에서 불면증에 대해서 좋다고 권해준 양파, 그가 좋아하던 파이프와 담배통, 테오가 보낸 편지 한 통과 친구와의 밀접한 결합을 상징하는 봉랍, 삶의 불꽃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불타고 있는 촛대, 금주의 상징인 빈 포도주 병 등이 그와 같은 대상들이었다.

《달이 빛나는 밤의 산책》(1890년)에서는 달이 솟아 오를 때 올리브 정원과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풍경을 산책하는 한 쌍의 사람이 보인다. 남자 인물은 붉은 머리카락과 수염으로 화가 자신의 모습과 같은 특징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그림은 여인과 함께 하는 '진실한' 삶과 그것의 대용인 자연과 자연을 표현하는 예술에 대한 빈센트의 소원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와 스케치

2020년 흐로닝어 미술관에서 도난 당했다가 복구된 《뉘넌의 목사관 정원

빈센트의 유화에 관심이 쏠린 탓에 그가 훌륭하고 아주 생산적인 소묘 화가라는 사실은 쉽게 잊히고는 했다. 소묘 작품은 미술가의 이력의 초기에서부터 존재했고,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제작되었다. 1888년 여름 몇 주 동안 반 고흐는 값비싼 유화 물감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전적으로 소묘만을 그렸다.

반 고흐는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소묘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아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1880년, 선생이 없었기 때문에 교본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형상 묘사의 법칙을 소묘를 통해서 습득하기 시작했다. 홀란드 시대에 그는 무엇보다 평범한 농부와 풍경, 그 중에서도 그가 잠시 머물렀던 장소인 헤이그의 풍경을 표현했다. 그는 연필, 펜, 부분적으로는 백묵이나 흑연을 사용해서 대규모로 소묘 작품을 그렸다. 안톤 마우베가 1881년 말 고흐에게 수채화 기법을 알려준 이후로 그는 불투명한 그림 물감으로 채색한 그림을 완성했다. 파리 시절에는 유화에 비해서 소묘가 뒷전으로 물러났다. 1887년 이후부터 빈센트는 다시 소묘를 점점 많이 그리게 되었다. 그 중에서 파리의 풍경을 채색한 소묘화도 있다.

그는 아를에서 자란 갈대를 재료로 삼아서 직접 만든 펜을 도구로서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그는 새로운 표현 기술을 개발했다. 연필로 미리 그린 밑그림 위에 갈대펜을 사용해서 아주 다양한 선, 점, 곡선, 나선으로 소재가 표현되었다. 이 시기에 그려진 그의 소묘 중에서 많은 작품이 유화와 연관되어 있다. 소묘는 유화를 준비하기 위해서 이용되었거나, 아니면 반 고흐가 나중에 그려진 그림의 소재를 소묘로 다시 완성하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소묘 작품은 삼자에게 그림에 대한 인상을 주거나 회화로 그려진 작품에서 그가 본 특정한 실수를 교정하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마지막 그림

《나무 뿌리》, 1890년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은 1890년에 그린 《나무 뿌리》이다. 미완성의 작품으로, 현재 반 고흐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명성과 유산

부드러운 표정과 약간의 미소를 띤 젊은 여성의 흑백 정식 상반신 사진
요하나 반 고흐봉어르, 1889

1880년대 후반 반 고흐의 첫 전시회 이후, 그의 명성은 예술가, 미술 비평가, 딜러 및 수집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퍼져 나갔다.[282] 1887년, 앙드레 앙투안은 파리의 자유극장에 반 고흐의 작품을 조르주 쇠라폴 시냐크의 작품과 함께 걸었으며, 그중 일부는 줄리앙 탕기가 인수했다.[283] 1889년, 알베르 오리에는 《르 모데르니스트 일뤼스트레》에서 빈센트의 작품을 "불, 강렬함, 햇빛"이 특징이라고 묘사했다.[284] 1890년 1월 브뤼셀에서 열린 앙데팡당 전시회에 열 점의 그림이 전시되었다.[285] 프랑스 대통령 마리 프랑수아 사디 카르노도 반 고흐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286]

반 고흐 사망 후 브뤼셀, 파리, 헤이그 및 안트베르펜에서 기념 전시회가 열렸다. 그의 작품은 Les XX에서 6점이 전시되는 등 여러 저명한 전시회에 출품되었으며, 1891년에는 브뤼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285] 1892년 옥타브 미르보는 반 고흐의 자살이 "예술계에 있어 무한히 슬픈 손실... 비록 그의 장례식에 많은 사람이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은 아름다운 천재의 불꽃이 꺼짐을 의미하며, 가련한 빈센트 반 고흐는 그가 살았을 때처럼 무명인 채 소외되어 죽음으로 떠났다"고 썼다.[283]

1891년 1월에 사망하여 빈센트의 동생 테오가 사망함으로써, 그의 가장 열렬하고 인맥 넓은 지지자가 사라졌다.[287] 테오의 미망인 요하나 반 고흐봉어르는 20대의 네덜란드 여성이었으며 남편이나 형부를 오래 알지 못했으나, 갑자기 수백 점의 그림, 편지, 소묘와 어린 아들 빈센트 빌럼 반 고흐(반 고흐와 동명)를 돌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282][note 8] 고갱은 반 고흐의 명성을 홍보하는 데 도움을 줄 의사가 없었으며, 요하나의 오빠 안드리스 봉어르 역시 그의 작품에 냉담해 보였다.[282] 비평가들 중 반 고흐를 초기에 지지해 주었던 알베르 오리에는 1892년 27세의 나이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289]

밀짚모자를 쓰고 캔버스와 물감 상자를 든 남자가 나무가 늘어서 있고 잎이 흩뿌려진 시골길을 따라 왼쪽으로 걷고 있는 모습
《타라스콩 가는 길의 화가》, 1888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 중 화재로 파괴됨)

1892년 에밀 베르나르는 파리에서 반 고흐의 소규모 개인전을 열었고, 줄리앙 탕기는 요하나 반 고흐봉어르로부터 위탁받은 여러 점을 포함해 반 고흐의 그림들을 전시했다. 1894년 4월, 파리의 뒤랑뤼엘 갤러리는 반 고흐의 유산 중 10점을 위탁 판매하기로 합의했다.[289] 1896년, 당시 무명의 미술학도였던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는 브르타뉴 연안의 벨 일에 있는 존 러셀을 방문했다.[290][291] 러셀은 반 고흐의 친한 친구였으며 마티스에게 반 고흐의 작품을 소개하고 그의 소묘 한 점을 선물했다. 반 고흐의 영향을 받은 마티스는 흙빛 팔레트를 버리고 밝은 색채를 택했다.[291][292]

1901년 파리 베르넴-죄느(Bernheim-Jeune) 갤러리에서 대규모 반 고흐 회고전이 열렸는데, 이는 앙드레 드랭모리스 드 블라맹크를 열광시켰고 야수파의 출현에 기여했다.[289] 1912년 쾰른의 존더분트(Sonderbund) 전시회, 1913년 뉴욕 아모리 쇼, 1914년 베를린 전시회 등 중요한 그룹전들이 이어졌다.[293] 헹크 브레머는 반 고흐에 대해 가르치고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294] 헬레네 크뢸러 뮐러에게 반 고흐의 예술을 소개했고, 그녀는 그의 작품을 열렬히 수집하게 되었다.[295] 에밀 놀데와 같은 초기 독일 표현주의 인물들은 반 고흐의 작품에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했다.[296] 브레머는 1928년에 반 고흐의 전작도록인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L'Oeuvre de Vincent van Gogh)을 출판한 낸 야콥 바르트 드 라 파일을 도왔다.[297][note 9] 반 고흐의 명성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첫 정점에 도달했는데,[300] 이는 1914년 세 권으로 출판된 그의 편지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301] 그의 편지들은 표현력이 풍부하고 문학적이며, 19세기 편지 작품중 가장 뛰어난 저작물 중 하나로 묘사되어 왔다.[8] 이 편지를 통해 반 고흐가 예술을 위해 고뇌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강렬하고 헌신적인 화가라는 강력한 신화가 시작되었다.[302] 1934년 소설가 어빙 스톤은 테오에게 보낸 반 고흐의 편지들을 바탕으로 그의 생애를 다룬 전기 소설 《열정의 랩소디 (소설)》를 썼다.[303] 이 소설과 1956년 영화는 그의 명성을 더욱 높였으며, 특히 스톤이 추측하기로 이 책이 깜짝 베스트셀러가 되기 전에는 미국에서 단 몇 백 명만이 반 고흐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304][305]

1957년 프랜시스 베이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실된 반 고흐의 《타라스콩으로 가는 길의 화가》 복제본을 바탕으로 일련의 회화를 제작했다. 베이컨은 이 "잊혀지지 않는"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반 고흐를 소외된 아웃사이더로 간주했는데 이는 베이컨 자신의 처지에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베이컨은 반 고흐의 예술 이론에 동질감을 느꼈으며 테오에게 보낸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진정한 화가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스스로가 느끼는 방식대로 그린다."[306]

돈 맥클린은 반 고흐의 전기를 읽고 그에 대한 노래 "Vincent"를 작곡했다. 1971년의 이 노래는 도입부 가사인 "Starry, Starry Night"로도 잘 알려져 있다.[307]

반 고흐의 작품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으로 손꼽힌다. 오늘날 가치로 1억 달러 이상에 팔린 작품으로는 《가셰 박사의 초상》, 《조제프 룰랭의 초상》, 그리고 《붓꽃》등이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1993년 출판업자이자 외교관, 자선가인 월터 안넨버그가 기부한 자금으로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한 점을 5,700만 달러에 인수했다.[308] 2015년 《알리스캉의 가로수길》은 뉴욕 소더비스에서 최저 예상가 4,000만 달러를 훨씬 상회하는 6,63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309]

소행성 4457 반 고흐는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310]

2022년 10월, 화석 연료 산업이 기후 변화에 미치는 영향에 항의하던 저스트 스톱 오일 활동가 두 명이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반 고흐의 《해바라기》에 토마토 수프 캔을 던진 뒤 미술관 벽에 손을 붙였다. 그림은 유리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손상되지 않았다.[311][312]

2024년 10월 15일, 네덜란드 농업수산식품자선자연부 장관 장 뤼메니에는 빈센트 반 고흐가 자란 지역인 노르트브라반트주반 고흐 국립공원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313][314]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반 고흐와 같은 이름을 쓰는 테오의 아들 빈센트 빌럼 반 고흐 (1890–1978)[315]는 1925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유산을 상속받았다. 1950년대 초 그는 4권으로 구성된 편지 완전판을 출판했다. 이후 그는 전체 컬렉션을 구입하여 보관할 재단을 네덜란드 정부가 보조하도록 협상을 시작했다.[316] 테오의 아들은 작품들이 가능한 한 최상의 조건에서 전시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프로젝트 기획에 참여했다. 프로젝트는 1963년에 시작되었으며, 건축가 헤리트 리트펠트가 설계를 맡았으나 1964년 그가 사망한 후 구로카와 기쇼가 책임을 맡았다.[317] 작업은 1960년대 내내 진행되었으며 1972년 개관을 목표로 했다.[315]

반 고흐 미술관은 1973년 암스테르담의 뮈세윔플레인에 문을 열었다.[318] 이곳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이어 네덜란드에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박물관이 되었으며, 매년 15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2015년에는 기록적인 190만 명을 기록했다.[319] 방문객의 85%는 타국에서 온 사람들이다.[320]

나치 약탈 예술품

나치 독일 기간 (1933–1945) 동안 상당수의 반 고흐 작품의 주인이 바뀌었는데, 이 중 상당수는 망명을 강요당하거나 살해당한 유대인 수집가들로부터 약탈한 것이었다. 이 작품들 중 일부는 개인 소장품으로 사라졌다. 다른 작품들은 이후 박물관이나 경매에 다시 등장했으며, 종종 세간의 주목을 받는 소송을 통해 이전 소유자들에 의해 되찾아지기도 했다.[321][322] 독일 손실예술재단(German Lost Art Foundation)은 여전히 수십 점의 실종된 반 고흐 작품을 목록에 올리고 있으며,[323] 미국 박물관 연맹은 나치 시대 소유권 이력 인터넷 포털에 73점의 반 고흐 작품을 등재하고 있다.[324]

대표작품

같이 보기

  • 사이프러스가 있는 푸른 밀밭
  • 정오의 휴식
  • 아를

주해

  1. Vincent van Gogh에 정통 네덜란드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핀선트 판 호흐"가 되나 국립국어원에서는 이미 굳어진 외래어 관용을 존중하여 "빈센트 반 고흐"로 표기 용례를 확정지었다.[1]
  2. van Gogh는 네덜란드어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발음된다. 홀란트 네덜란드어에서는 v와 g가 무성음이기 때문에 [ˈfɪnsɛnt fɑŋ ˈxɔx] ( )로 발음된다. 그는 브라반트에서 자랐고 글을 쓸 때 브라반트 방언을 사용했다. 따라서 그가 발음한 van Gogh는 유성음 v와 구개음화된 g 및 gh를 사용해 [vɑɲ ˈʝɔç]로 발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주로 활동한 프랑스에서는 van Gogh를 "방 고그([vɑ̃ ɡɔɡ(ə)]"로 발음한다.[2]
  3. 일각에서는 죽은 형과 같은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 젊은 예술가에게 깊은 심리적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으며, 남성 인물 쌍을 묘사하는 것과 같은 그의 작품 요소들이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다.[24]
  4. "크리스마스에 아버지와 꽤 심하게 다투었는데,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아버지는 내가 집을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아버지가 너무 단호하게 말씀하셔서 저는 그날 바로 집을 나갔습니다."
  5.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당시 고흐를 진료한 의사의 손자의 증언에 불과하다.[105][106]
  1. 보슈의 누이인 아나 보슈(1848–1936) 역시 예술가였으며, 1890년에 《아를의 붉은 포도밭》을 구입했다.[137]
  2. Van Gogh (2009), Letter 719빈센트가 테오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 아를, 1888년 11월 11일 일요일 또는 12일 월요일;
    나는 두 점의 캔버스 작업을 하고 있단다... 양배추, 사이프러스, 다알리아와 인물들이 있는 우리 에턴 정원의 회상이지... 고갱은 나에게 상상할 용기를 주고, 상상의 산물들은 참으로 더 신비로운 성격을 띠게 된단다.
  3. 붕대를 푼 후의 반 고흐를 본 테오와 그의 아내, 가셰와 그의 아들, 그리고 시냐크는 귓불만 제거되었다고 주장했다.[152] 도이토와 르루아에 따르면 대각선 절단으로 귓불과 아마도 그보다 조금 더 잘려 나갔다고 말했다.[153] 경찰관과 레이는 반 고흐가 귓바퀴 전체를 잘라냈다고 주장했다.[152] 레이는 1930년 소설가 어빙 스톤을 위해 메모를 작성하고 절단선을 스케치하면서 이 진술을 반복했다.[154]
  4. 지누 부인에게 주려 했던 버전은 유실되었다. 아를에 있는 그녀에게 이 그림을 전달하려던 시도가 그의 2월 병 재발을 재촉했다.[182]
  5. 더 그래픽이나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같은 화보 잡지에서 활동하던 흑백 화가들은 반 고흐가 가장 좋아하던 예술가들이었다.[217]
  6. Van Gogh (2009), Letter 535 To Theo van Gogh. Nuenen, on or about Tuesday, 13 October 1885:
    옛 네덜란드 그림들을 다시 보았을 때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대개 아주 빠르게 그려졌다는 거야. 할스나 렘브란트, 라위스달 같은 위대한 거장들은—다른 많은 이들도 마찬가지로—가능한 한 한 번에 쓱 써 내려갔고, 거기에 너무 많이 다시 손대지 않았지. 그리고—이 점도 중요한데—잘 그려졌다면 그대로 두었어. 무엇보다 나는 렘브란트와 할스가 손을 표현한 것에 감탄했어. 살아있는 손이었지,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강요하는 그런 의미에서 '완성된' 것은 아니었어... 이번 겨울에 옛 그림들에서 발견한 방식들에 대해 여러 가지를 탐구해보려 해. 내게 필요한 것을 아주 많이 보았거든. 하지만 무엇보다도—소위 '단숨에 그려내는 것'—옛 네덜란드 화가들이 그것을 얼마나 훌륭하게 해냈는지 알 수 있어. 몇 번의 붓질로 '단숨에 그려내는 것', 지금 사람들은 그런 건 들으려 하지도 않겠지만—그 결과가 얼마나 진실한지 몰라.
  7. 렘브란트는 반 고흐보다 많은 50점 이상의 자화상을 제작했으나, 그는 40년에 걸쳐 이를 수행했다.[249]
  8. 그녀의 남편은 가족의 유일한 부양자였으며, 요하나에게는 파리의 아파트 한 채와 몇 가지 가구, 그리고 당시에는 "전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형부의 그림들만이 남겨졌다.[288]
  9. 드 라 파일의 1928년 카탈로그에서 반 고흐의 각 작품에는 번호가 부여되었다. 문자 "F" 로 시작하는 이 번호들은 특정 그림이나 소묘를 지칭할 때 자주 사용된다.[298] 당시 카탈로그에 등재된 모든 작품이 현재 반 고흐의 진품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299]

각주

  1. “인명에서 'van'의 외래어 표기”. 《국립국어원》. 2020년 1월 16일. 2026년 4월 13일에 확인함. 
  2. Veltkamp, Paul. “Pronunciation of the Name 'Van Gogh'. vggallery.com. 2015년 9월 2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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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 Callow (1990), 116–117. 얀 훌스커의 연구를 인용하면, 사망한 두 아이는 각각 1874년과 1879년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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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외부 링크